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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역사 #41] 태조 - 종묘 2

[뉴트리션=조선왕조실록 기획 기사팀]

< 내용 > 

○ 태조 3년 11월 10일 (병오) 용산강에 거둥하여 종묘의 재목을 살펴보다

임금이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여 종묘(宗廟)의 재목을 살펴보았다.

○ 태조 3년 12월 3일 (무진) 왕도 공사의 시작에 앞서 황천 후토와 산천의 신에게 고한 고유문

임금이 하루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은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 신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아뢰건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 옛 것을 개혁하고 새 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니, 신단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즐(陰?)의 기쁨을 얻어,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조선(朝鮮) 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 일관(日官)이 고하기를, ‘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 신 단(旦)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종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천도한 것인데, 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 ‘종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 

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매,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 오고 개는 날을 때 맞추어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 신 단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 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은 이러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山)을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水]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名山) 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조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이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 이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 태조 3년 12월 4일 (기사) 종묘와 궁궐터의 오방신에게 제사지내고, 중들을 모아 공사하게 하다

중추원 부사 최원(崔遠)을 종묘를 세우려는 터에 보내고, 또 첨서중추원사 권근(權近)을 궁궐 지을 터에 보내서 오방(五方)의 지기(地祇)에게 제사지내고서 그 터를 개척하였는데,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여러 절의 중들을 모집하여 관청에서 옷과 먹을 것을 주어서 공사장에 나가게 하였다. 임금이 종묘의 터를 처음 닦은 광경을 보았다.

○ 태조 4년 5월 27일 (기미) 태묘 건축 공사를 둘러보고 응방에 거둥하다

임금이 태묘(太廟)의 건축 공사를 보고, 한강(漢江)의 응방(鷹坊)에 거둥하였다.

○ 태조 4년 7월 27일 (무오) 종묘에 거둥하여 건축 상황을 둘러보다

종묘에 거둥하여 그 건축하는 것을 보았다. 

○ 태조 4년 9월 29일 (경신) 대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다. 그 규모와 구성 및 배치 상황

이달에 대묘(大廟)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대묘(大廟)의 대실(大室)은 7간(間)이며 당(堂)은 같게 하고 실(室)은 따로 하였다. 안에 석실(石室) 5간을 만들고 좌우의 익랑(翼廊)은 각각 2간씩이며, 공신당(功臣堂)이 5간, 신문(神門)이 3간, 동문이 3간, 서문이 1간이었다. 

빙둘러 담장을 쌓고 신주(神廚)가 7간, 향관청(享官廳)이 5간이고, 좌우 행랑이 각각 5간, 남쪽 행랑이 9간, 재궁(齋宮)이 5간이었다. 새 궁궐은 연침(燕寢)이 7간이다. 동·서 이방(東西耳房)이 각각 2간씩이며, 북쪽으로 뚫린 행랑이 7간, 북쪽 행랑이 25간이다.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간,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남쪽으로 뚫린 행랑이 5간, 동쪽의 소침(小寢)이 3간이다.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 행랑에 닿았고,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동쪽 행랑에 닿았으며, 서쪽 소침(小寢) 3간과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의 남쪽 통하는 행랑에 닿았다.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서쪽 행랑에 닿았고, 보평청(報平廳)이 5간, 정사를 보는 곳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이방(耳房)이 각각 1간씩이며, 남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7간, 동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15간이다. 

처음 남쪽에서 통행하는 행랑 5간이 동쪽 행랑에 닿고, 서쪽으로 통하는 행랑 15간도 역시 남쪽 행랑 5간에서 서쪽 행랑에 닿고, 연침 북쪽 행랑 동쪽 구석에서 정전(正殿)에 그치고 북쪽 행랑의 동쪽 23간이 동쪽 행랑, 서루(西樓)에서 정전(正殿)까지 가는 북쪽 행랑 서쪽 20간이 서쪽 행랑이 되어, 이상이 내전(內殿)이다.

정전(正殿)은 5간으로 조회를 받는 곳으로 보평청의 남쪽에 있다. 상하층의 월대(越臺)가 있는데, 들어가는 깊이가 50척, 넓이가 1백 12척 5촌(寸), 동계(東階)·서계(西階)·북계(北階)의 넓이가 각각 15척이다. 

윗층계[上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石橋)가 5층[五級]인데 중계(中階)의 사면 넓이가 각각 15척, 아랫층계[下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가 5층이다. 북쪽 행랑 29간을 통하는 행랑은 북행랑에서 정전(正殿)의 북쪽에 닿았고, 수라간(水刺間) 4간과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동쪽에 닿아서 내전의 동쪽 행랑과 연했으며, 그 남쪽 9간은 전문의 동각루(東角樓)에 닿았다. 

서루(西樓) 3간도 상·하층이 있는데,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서쪽 구석에 닿아서 내전의 서쪽 행랑과 연하고, 그 남쪽 9간은 전문(殿門)의 서각루(西角樓) 전정(殿庭)에 닿았다. 넓이는 동서(東西)가 각각 80척, 남쪽이 1백 78척, 북쪽이 43척이며, 전문 3간은 전(殿)의 남쪽에 있고, 좌우 행랑 각각 11간과 동(東)·서각루(西角樓) 각각 2간과 오문(午門) 3간은 전문(殿門)의 남쪽에 있다. 동서의 행랑은 각각 17간씩이며, 수각(水閣)이 3간, 뜰 가운데에 석교(石橋)가 있으니 도랑물 흐르는 곳이다. 문(門)의 좌우의 행랑이 각각 17간씩이며, 동·서각루가 각각 2간씩이다. 동문을 일화문(日華門)이라 하고, 서문을 월화문(月華門)이라 한다.

그 밖에 주방(廚房)·등촉방(燈燭房)·인자방(引者房)·상의 원(尙衣院)이며, 양전(兩殿)의 사옹방(司饔房)·상서사(尙書司)·승지 방(承旨房)·내시 다방(內侍茶房)·경흥부(敬興府)·중추원(中樞院)·삼군부(三軍府)와 동·서루고(東西樓庫)가 무릇 3백 90여 간이다.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의 각사(各司) 공청이 벌여 있었다.

○ 태조 4년 윤9월 1일 (임술) 종묘에 이안 도감을 설치하다 

종묘에 이안 도감(移安都監)을 설치하였다.

○ 태조 4년 윤9월 1일 (임술) 대묘 동역 제조관에게 잔치를 내려 주고 내구마 1필 씩을 하사하다

대묘(大廟)의 동역 제조관(董役提調官)에게 잔치를 내려 주고는 각각 내구마 1필씩 하사하였다.

※ 자료 제공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http://www.sejongkorea.org ]

국사편찬위원회 [ http://sillok.history.go.kr ]

한국고전번역원 [ 한국고전종합DB - http://db.itkc.or.kr ]

문화재청 [ http://www.cha.go.kr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http://stdweb2.korean.go.kr ]

뉴트리션  support@nutrition2.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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